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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과 자연은 올해 밀라노 디자인 위크가 선보인 다양한 전시를 대표하는 흐름이었다. 디자인의 본질은 잃지 않으면서 한층 역동적이고 유희적인 디자인 언어로 다양성을 추구한 실험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지금 디자인 신은 소비자도 브랜드도 정형화된 공식과 유행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고유한 것을 탐색하는 중이다.
푸오리살로네 2024의 테마는 ‘자연의 재료(Materia Natura)’였다. 단순히 자연에서 얻은 소재를 활용하자는 일차원적 담론이 아니다. 자연과 소재 사이의 연결성, 자연에 잠재된 또 다른 가능성을 탐구해 의식 있는 디자인 문화를 만들어가자는 제안이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성찰은 디자인 신에서 늘 거론된 화두이기에 다소 뻔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푸오리살로네는 기술과 속도에 의존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본질을 되짚고자 했다. 이 테마를 가장 깊숙이 관통한 것은 ‘대지(ground, the earth)’를 테마로 에르메스가 전개한 〈소재의 본질(Topography of Material)〉전이었다. 에르메스는 실크 저지 무늬에 착안해 흙, 돌, 벽, 나무, 슬레이트 등을 패턴화한 전시 여정 설계로 인간과 자연, 나아가 우주와의 관계까지 곱씹어보게 했다. 넨도가 파올라 렌티에서 선보인 〈자연의 속삭임(Whisper of Nature)〉전은 자연의 변화를 시각적으로 구현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사토 오오키는 빛, 구름, 연못, 비, 그림자 등 자연현상으로 인해 변화하는 주변 환경을 관찰해 형태와 재료로 표현했다. 빗방울이 지표면에 닿는 순간이나 고도에 따라 달리 보이는 구름 형태, 빛과 그림자라는 불가분의 관계 등을 다섯 가지 독특한 컬렉션으로 선보이며 넨도의 건재함을 입증했다.
화려함이나 럭셔리가 이탈리아 디자인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탈리아는 기후변화와 지속 가능성을 국가 커리큘럼에 포함한 최초의 국가다. 재생 가능한 자원으로 전력의 3분의 1 이상을 생산하며 2025년까지 도시 폐기물의 65%를 재활용하겠다는 유럽연합의 목표를 이미 초과 달성했다. ‘메이드 인 이탈리아’ 브랜드는 녹색 경제적 측면에서 지원해주며, 34만 5000여 개의 이탈리아 기업이 저탄소 생산 방식을 도입했다. 이탈리아가 이토록 지속 가능성에 진심인 것은 단순한 제품을 넘어 원자재와 제조 공정까지도 환경적·미학적 가치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다. 살로네 델 모빌레 역시 이런 흐름을 반영해 지속 가능성 정책 기준을 강화했다. 전시장 한가운데에서 관람객의 눈길을 끈 대형 파빌리온 ‘언더 더 서피스Under the Surface’는 주최 측의 메시지를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물속에 잠긴 섬의 형태로 파빌리온을 구축했는데 세계은행에서 분석한 물 소비량 정보를 작품 곳곳에 적어 넣어 관람객이 반성하도록 만들었다. 프로젝트의 목적은 아낌없이 물을 써온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 나아가 디자이너와 제작자들이 어떤 책임감을 갖고 가구 생산에 참여해야 하는지 그 맥락과 과정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올해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는 많은 디자이너가 적게나마 그 해답을 가져왔다. 지속 가능한 재료를 비롯해 물을 절약할 수 있는 다양한 제어 시스템까지, 많은 디자이너와 기업이 탄소 중립 실현에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헤리티지 브랜드의 퍼포먼스는 크게 둘로 나뉘었다. 과거의 가치로 향수를 불러일으키거나, 기존의 관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여정을 탐색하거나. 하지만 올해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 참여한 많은 브랜드는 이 공식을 깼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닌 초현실로 관람객을 초대했다. 팔라초 쿠사니에서 웨어러블 카사 컬렉션을 선보인 MCM은 현실과 메타버스를 넘나들었다. 두 가지 방법으로 입장 가능한 평행 우주 같은 하이브리드 공간을 구축해 전시가 끝난 후에도 아바타들이 오브제를 착용하며 또 다른 세계로 연결되도록 했다. 전시 디자인을 맡은 아틀리에 비아게티는 “과거, 현재, 미래 그 사이에서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감정을 재현하고 싶었다”라며 설계 의도를 전했다. 팔라치나 아피아니를 배경으로 프레떼Frette와 협업한 컬렉션을 선보인 톰 브라운의 퍼포먼스는 그야말로 한 편의 꿈 같았다. 빈 전시 공간에는 6개의 침대만 일렬로 심플하게 놓여 있었다. 종소리가 울리자 속옷 차림의 모델 6명이 한 명씩 들어와 침대 옆에 자리를 잡았고, 또다시 종소리가 울리자 모델들이 셔츠를 정돈하고 넥타이를 매고 옷을 갖춰 입었다. 그리고 별안간 안대를 쓰고 침대에서 낮잠을 잤다. 꿈을 꾸기 위해 옷을 입는다는 톰 브라운의 스토리텔링은 패션에 대한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익숙한 틀에서 벗어나 디자인에 새로운 감성과 리듬을 불어넣고자 하는 브랜드들의 열망을 눈여겨봐야 할 때다.
올해 밀라노 디자인 위크가 대대적으로 강조한 지속 가능성은 단순히 환경적 책임만을 촉구한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를 뒷받침할 탄탄한 기술력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러한 기술의 응집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곳은 다름 아닌 주방이었다. 많은 기업이 친환경 소재는 물론 혁신적 재활용 시스템, 에너지 효율 제품, 폐기물을 줄일 수 있는 주방 솔루션 등 다양한 최첨단 주방 기술로 지속 가능한 미래에 한발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노력을 보여주었다. 소비자의 요구가 다양해진 만큼 유연한 모듈식 주방 시스템도 진화했는데 이는 요리, 식사, 엔터테인먼트 공간을 통합하기 위한 디자인이기도 했다. 유럽 주방 가구의 트렌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유로쿠치나’의 핵심은 다름 아닌 다기능성과 친환경성. 식품 분야가 디자인계와 좀 더 밀접해졌으며, 음식은 하나의 상품이자 프로젝트로 인류의 미래에 변화를 불러올 각광받는 콘텐츠라는 것을 시사했다.
공간의 삼원색이 화이트·블랙·우드가 된 듯한 한국의 디자이너들은 올해 밀라노에서 컬러의 향연에 정신이 아찔해졌을지도 모른다. 유럽의 많은 디자이너는 안정감과 통일성에서 벗어나 자유로움과 재미를 찾고 있는 듯했다. 전시장의 주요 무대는 활기차고 역동적인 컬러로 채워졌고, 다양한 색상에 이질적 소재를 결합하거나 공간 전체를 과감한 색상으로 변화시키는 시도가 쉽게 눈에 띄었다. 컬러 사용을 기피했던 욕실이나 주방에 보색을 활용한 디자인도 많아졌다. 이는 획일화된 취향에서 벗어나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려는 사용자가 늘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디자이너들은 마치 이런 흐름을 기다렸다는 듯 가구부터 벽체, 선반, 자그마한 홈 액세서리까지 다양한 곳에 폭넓은 색상 스펙트럼을 적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