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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티씨 블랭크의 세계는 형형색색 다채롭고 선명하며 유쾌하다. 쓰레기를 활용한 작업을 선보이는 그의 작업은 단순히 쓰레기를 재활용하는 수준을 넘어 그것이 가진 미적 가능성을 탐구하는 데서 시작한다. ‘쓰레기 산책자’라는 별칭처럼 이티씨 블랭크는 일상에서 발견한 쓰레기의 형태와 색감에 주목하며 이를 새로운 시각으로 재창조한다. 더 나아가 쓰레기라는 매개물로 세상과 소통하는 이티씨 블랭크의 창작 스토리는 우리가 주변의 평범한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을 새롭게 전환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이렇듯 디자이너만의 독특한 미감은 많은 브랜드와 대중이 계속해서 그를 찾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Interview with 이티씨 블랭크
안녕하세요. 시각 디자인을 기반으로 다양한 작품 활동을 하는 이티씨 블랭크의 최명지입니다. 특히 ‘쓰레기’를 활용한 창작에 주력하고 있어요. 쓰레기는 나이와 기질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서 배출되죠. 인간이 만든 사물 중 가장 이동이 잦고 어디에나 존재하는 요소이기도 해요. 저는 이 점에 주목했습니다. 인간이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쓰레기를 새로운 사물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을 하기로 한 거죠. 단순히 환경 문제를 알리는 데 그치지 않고 쓰레기가 가진 미적 가치를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해요.
대학 졸업 후 전공을 살려 가죽 브랜드에서 시각 디자이너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환경 관련 소셜벤처의 브랜딩 팀에서 디자이너로 근무했어요. 회사에서 하는 그래픽 작업도 좋았지만, 저는 손으로 직접 무언가 만들길 더 좋아했어요. 점점 회사의 틀에서 벗어나 저만의 스타일로 작업물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갈망이 커졌죠. 고민 끝에 프리랜서로서 작업물을 제작하는 데 도전해 보기로 했어요. 그렇게 지난 2020년 이티씨 블랭크를 시작했습니다.
이티씨etc는 ‘edge, trash, care’ 세 단어의 앞 글자를 따온 것으로, 삶의 가장자리에 있는 쓰레기를 다룬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브랜드의 메인 슬로건인 ‘더 이상 쓰레기가 아닌 쓰레기’는 이를 잘 표현하죠. 빈칸을 뜻하는 블랭크blank는 쓰레기의 소재나 작업을 어느 하나에 한정하지 않고, 다양한 프로젝트에 맞는 단어로 유연하게 채우는 공백을 의미해요. 예를 들어 바다 쓰레기를 다룬다면 ‘etc (ocean waste)’, 박스를 다룬다면 ‘etc (box)’처럼요.
환경 문제에 대한 특별한 관심에서 출발한 건 아니었어요. 평소 새롭고 정제된 상품보다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헌 물건에 더 관심이 많았어요. 그뿐만 아니라 길거리에 자유로운 형태로 돌아다니는 자그마한 쓰레기 조각들 그리고 그것들이 가진 다채로운 색감에 매료되었죠. ‘지금 보이는 이 자유로운 쓰레기들은 어디서 버려져 여기까지 왔을까?’ 하며 생각하고 유추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언제, 어디서, 어떤 재질의, 어떤 모양의, 어떤 색감의 쓰레기를 만날지 모르는 상황도 재밌고요! 특이한 쓰레기를 수집하는 것도 즐겨요. 그래서 저는 스스로 ‘쓰레기 산책자’라고 부릅니다. 아직도 쓰레기를 수집할 땐 주변의 시선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어요. (웃음)
수많은 쓰레기 중 해안 쓰레기에 가장 큰 흥미를 느꼈어요. ‘Busan Ocean Waste Object’는 부산 해안가에 버려진 쓰레기를 수집한 후 그것들의 다양한 형태와 색감을 그대로 담은 오브제예요. 잔잔하고 푸른 바닷속, 물고기 그리고 아름다운 산호초 사이 플라스틱 잔해의 모습을 담아 바다 쓰레기의 현실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쓰레기가 가진 미감을 알리고자 했어요. 이러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환경에 관심이 가더라고요. 지금은 최대한 환경을 생각하는 방향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포켓볼 프로젝트’를 소개해 드리고 싶어요. 우연히 당구장에서 버리려 내놓은 당구공과 포켓볼을 보고 진행하게 된 프로젝트예요. 당구대 위에서 게임의 운명을 결정짓기 위해 이리저리 치열하게 움직였을 공이 쓰임을 다하고 스크래치가 가득한 채로 버려져 있는 모습은 제 마음을 움직였죠. 저는 버려진 공을 누군가의 공간에 향과 편안함을 주는 인센스 홀더로 재탄생시켰어요. 무게가 있어 종이를 가볍게 누르는 문진으로도 사용할 수 있고요. 특히, 패키지에도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단순한 포장지가 아닌 하나의 오브제로 활용할 수 있도록 고리를 달아 제작했고, 모든 프린팅은 직접 실크스크린 작업으로 완성했습니다. 포켓볼 프로젝트는 1년 가까이 준비한 만큼 애정이 깊은 작업이에요.
오브제 작업 외에도 디지털 그래픽과 아트북 제작에도 힘쓰고 있어요. 최근엔 스웨덴 여행 중에 휴대용 스캐너로 스캔 한 길거리, 벽 그래픽에 대한 보고서를 소개했어요. 거리의 지저분한 스티커, 외벽과 표지판에 그려진 낙서(그라피티)는 수거해서 버릴 수 없는 새로운 종류의 쓰레기죠. 스캐너를 이용해 400여 개의 그래픽 폐기물을 수거하고, 이를 8개의 파트로 나눠 보고서 형식으로 제본했어요. 이렇듯 쓰레기 이미지를 활용한 디지털 작업으로 창작의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습니다.
오래된 물건과 벼룩시장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물건들, 프린팅된 그래픽 소스를 보면서 영감을 얻곤 해요. 해외여행을 가면 꼭 주말에 열리는 벼룩시장에 가서 그 나라에만 있는 빈티지 소품을 사 모으기도 하죠. 작년에는 한 달간 스톡홀름에 머물며 지역의 모든 세컨드 핸즈 숍과 벼룩시장을 둘러보기도 했어요. 꼭 해외가 아니더라도 평소엔 ‘아름다운 가게’를 들리거나 중고 거래 앱을 보며 특이한 물건이 있는지도 봐요. 그렇게 수집한 소품을 정리해 둔 인스타그램 계정 @aa_mu_coo_na도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길거리에 버려진 질서 없는 형태의 쓰레기 조각들을 보면 엉뚱한 생각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아요. 그러다 떠오른 아이디어는 꼭 메모를 해두는 편이고, 자주 들여다보며 아이디어를 발전시키죠.
디자인 아웃풋을 가지고 어떻게 더 많은 분과 소통할 수 있을지 관심이 큰 요즘이에요. 마케팅은 참 어려운 부분이더라고요. 열심히 준비한 프로젝트가 생각보다 큰 관심을 받지 못할 땐 정체된 느낌이 들기도 하죠. 제가 부산에 살고 있어 그런 순간이 오면 바다에 가서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재충전하거나, 특이한 해안 쓰레기를 수집하면서 기분 전환을 한답니다. 무엇보다 응원해 주시는 분들의 말 한마디에 다시 힘을 얻곤 해요.
다른 브랜드와 협업 프로젝트를 통해 빈지노 님과 작업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빈지노 님께서 제 작업을 잊지 않으시고, 개인적으로 작업실에 사용할 쓰레기통 2종 제작을 의뢰해 주신 적이 있어요. 사이즈 이외에 제한을 두지 않아 더 자유롭게 구상할 수 있었습니다. 프리랜서로 활동하지 않았다면 할 수 없었던 경험이라 가장 기억에 남아요. 그리고 3년 전부터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참여하고 있는데 매년 제 책을 구매하고 사인을 요청하는 분들이 계세요. 그럴 때마다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부끄럽지만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갈 힘이 되곤 해서 소중한 순간이죠.
부산 전포동에 작업실 겸 쇼룸으로 사용할 작은 공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만의 취향으로 채워질 공간에서 재미난 작업을 할 생각과 지금까지 제작한 오브제와 아트북을 쇼룸에서 직접 보여드릴 계획에 설레기도 해요. 그리고 쓰레기를 활용한 액세서리와 액자 프로젝트를 2025년 안에 선보일 예정입니다.
자료 제공 및 협조 이티씨 블랭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