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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디자인의 화두는 더 이상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다. 기후 위기와 사회적 불평등, 자원 고갈이 일상이 된 지금, 디자인은 문제 해결의 도구이자 미래를 그려내는 언어로 진화하고 있다. 최근 핀란드 디자인 협회 오르나모(Ornamo)가 발표한 지속가능성 보고서 Towards Tangibility( 현실화로 나아가며)는 그 방향성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보고서는 “지속가능성 전환(sustainability transition)”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디자이너와 조직에 어떤 변화를 요구 하는지 묻는다. 23개 조직의 27명(디자이너와 지속가능성 전문가)이 인터뷰에 참여했고, 그 중 3분의 2는 경영진 혹은 리더 급이었다. 이들의 목소리는, 추상적이고 멀게만 느껴지던 지속가능성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현실 속 실천으로 끌어내릴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들려준다.
이번 연구에는 23개 조직의 27명이 참여했다. 절반은 디자이너, 나머지는 지속가능성 전문가였으며, 3분의 2가 경영진이나 관리자급이었다. (Ornamo, Towards Tangibility 2025), 파일 캡쳐
규제가 만든 압력,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
핀란드는 이미 탄소중립 2035를 목표로 걸었고, 유럽연합은 에코디자인 규정, 디지털 제품 여권, 지속가능 포장법 등 강력한 규제들을 잇달아 발표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기업과 디자이너에게 때로는 부담으로, 때로는 기회로 다가온다. 보고서에 참여한 한 인터뷰이는 “규제는 비용을 늘리고 시스템 변화를 요구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경쟁력을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규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데이터와 보고, 공급망의 투명성이 필수적이고, 그 과정에서 디자이너들은 책임 있는 해답을 제시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책임 있는 디자이너란?
책임 있는 디자이너에게 요구되는 핵심 역량: 시스템 사고, 생애주기 분석, 지속가능 소재 이해, 시각화 능력, 규제 지식 등이 포함된다. (Ornamo, Towards Tangibility 2025), 파일 캡쳐
보고서에 따르면, 디자이너는 제품과 서비스의 전체 생애주기를 바라본다. 보고서는 지속가능성 전환 속에서 디자이너가 갖추어야 할 핵심 역량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소재의 선택에서부터 제조 방식, 에너지 사용, 재사용·재활용 가능성까지 고려하고, 다양한 사용자의 목소리를 존중하며, 프라이버시와 안전까지 디자인의 일부로 포함시킨다. 무엇보다도 “무엇을 더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어떻게 오래도록 가치 있게 유지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먼저 던지는 것이 책임있는 디자이너이다.
네 가지 핵심 주제: 데이터, 재료, 규제, 기술
보고서는 지속가능성 전환에서 가장 중요한 네 가지 축을 제시한다.
첫째는 데이터와 디지털화다. 생애주기 평가(LCA)와 탄소 발자국 계산 같은 데이터는 이제 디자인 과정의 필수 요소로 자리 잡았다. 디자이너들은 정량적인 자료를 통해 어떤 선택이 더 책임 있는 결과를 낳는지 비교하고, 이를 고객과 조직에 설득력 있게 제시해야 한다. 디지털화와 인공지능 역시 중요한 도구로 부상하고 있다. 복잡한 계산을 자동화하고, 다양한 시나리오를 시각화해 보여줌으로써 지속가능성 목표를 보다 실질적으로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제품과 재료 개발이다. 저탄소 자재, 산업 부산물 활용, 재활용 가능한 신소재 실험은 이미 여러 핀란드 기업에서 시도되고 있다. 새로운 재료를 발굴하고, 이를 통해 제품과 공간, 서비스 전반을 다시 설계하는 일은 디자인이 개입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영역이다. 예컨대 오래된 가구를 수리해 다시 유통하는 아르텍(Artek)의 2nd Cycle 프로젝트나, 목재 부산물을 활용해 세면대를 만든 우디오(Woodio)의 실험은 순환 디자인의 구체적인 사례다.
버려지는 소재 개발로 재 탄생된 우디오의 욕조 제품. 출처: https://woodio.fi/
셋째는 규제다. 책임 있는 디자인이 자율에만 의존해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차례 입증되었다. 앞으로 더욱 강화될 유럽연합의 에코디자인 규정, 디지털 제품 여권, 지속가능 포장법은 산업 전체가 새로운 표준을 따르도록 이끌고 있다. 디자이너와 기업은 이러한 법적 요구를 단순히 부담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는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실제로 기후 데이터와 디자인을 결합해 전략에 지속가능성을 내재화한 바이살라(Vaisala)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Ornamo의 Design Utilizer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지식과 기술이다. 지속가능한 전환은 결국 사람의 역량에 달려 있다. 디자이너는 새로운 소재와 기술을 이해하고, 복잡한 정보를 단순하고 직관적으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다학제적 협업 속에서 조율자이자 촉진자(facilitator)로서 역할을 맡아야 한다. 노멘 네시오(Nomen Nescio)가 단순하고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을 통해 소비 습관 자체에 변화를 제안하듯, 디자이너의 지식과 기술은 제품을 넘어 생활 방식을 설계하는 힘을 가진다.
앞으로의 10년을 향해
오르나모 보고서는 “지속가능성 전환은 기술적 변화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생활 방식과 습관, 인간 행동의 변화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결국 디자인은 이 전환을 우리 삶 가까이에 가져오는 중요한 매개체다.
핀란드 디자인이 지향하는 ‘순환과 포용’은 단지 원칙이 아니라, 우리가 앉는 의자, 입는 옷, 사용하는 세면대, 걷는 도시 공간 속에서 실질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현실이다. 앞으로의 10년, 핀란드 디자이너들은 이러한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떤 미래로 나아가고 싶은가?”
참고링크: https://www.ornamo.fi/en/sustainabilityreport/
기사원문링크> https://www.designdb.com/?menuno=1283&bbsno=5086&siteno=15&act=view&ztag=rO0ABXQAOTxjYWxsIHR5cGU9ImJvYXJkIiBubz0iOTkxIiBza2luPSJwaG90b19iYnNfMjAxOSI%2BPC9jYWxsPg%3D%3D#gsc.tab=0